1954년 6월 17일 우리나라 첫 월드컵 출전 - 네이버 블로그
또한 헝가리측은 한국의 북방정책에 지지와 이에 대한 협력의사를 표명하였다. 한국과 헝가리간의 수교, 노태우 대통령의 헝가리 방문과 함께 양국은 관계강화를 위해 제반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되어 나갔고 통상과 경제협력, 문화적 협력관계가 증진되어나갔다. 양국은 투자보장협정 및 경제협력협정, 문화협정, 외교관 및 사증면제협정, 이중과세방지협정, 항공협정 및 일반사증면제협정을 체결함과 동시에 양국간 경제공위원회와 정책협의회를 구성, 운영하게 되었으며 양국의 통상 및 경제협력과 더불어 국영방송사간 협력합의서 서명, 양국 문화협화간의 문화교류합의서 서명, 대학간의 교류 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공보처, 《제6공화국실록 ②》공보처, 1992 공보처, 《자료 제6공화국》공보처, 1992 하용출 외, 《북방정책: 기원, 전개, 영향》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2006. 12. 012006.
<월드컵2014> 1954년 한국에 '0-9 눈물' 안긴 헝가리 골키퍼 별세 | 연합뉴스1954년 스위스 월드컵 대회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이 헝가리와 대결을 앞두고 그라운드에 입장하고 있다. 한국은 당시 헝가리에 0-9로 패했다. <<연합뉴스DB>>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 첫머리에 쓰라린 아픔을 안긴 60년 전 1954년 스위스 월드컵 '0-9 패배'의 상대 주역인 헝가리의 전설적인 골키퍼 줄러 그로시치스가 세상을 떠났다. 헝가리 MTI통신은 그로시치스가 14일(한국시간) 심장마비로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향년 88세. 그로시치스는 1950년대 '마법의 마자르 군단'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세계 축구계를 뒤흔든 헝가리 대표팀의 수문장이었다. 1947년부터 1962년까지 활약하며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을 땄고, 1954년 월드컵 결승에서 서독에 2-3으로 패배하기 전까지 4년간 무패 행진을 이끌기도 했다.
헝가리 출장자료 - 한국보건산업진흥원
헝가리 지도자들도 개혁-개방정책의 일환으로 대외관계에 있어 전향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던 바, 그 동안 한국이 이룩한 경제발전을 인식하고 대 한반도 정책에 있어 실용주의적 입장을 보였다. 한국과 헝가리 양국은 1988년 8월 26일 상주대표부 교환설치에 합의하고 1988년 10월 25일 및 27일에 부다페스트와 서울에 각각 상주대표부를 개설하여 양국간 협력관계를 진전시켜 왔다. 그 후 최호중 외무부장관이 방한한 호른 졸라 헝가리 외무담당 국무비서와 양국간의 상주대표부를 상주대사관으로 격상시키기로 합의, 수교의정서에 서명(1989. 2. 1)함으로써 한국과 헝가리 양국은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정부수립 41년만에 사회주의 국가와 최초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우리정부는 북방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한편, 노태우 대통령의 헝가리 방문, 곤츠 헝가리 대통령의 한국방문으로 이어지며 관계가 증진되었다.
해외문화홍보원
여자 수구, 헝가리에 완패 - 한겨레
헝가리 연금제도 개요 및 연금 청구 절차
아울러 한국과 헝가리의 수교는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로 이어진 한국의 동구 사회주의 국가와의 수교를 견인시켰다. 수교 이후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1989년 11월 22일-24일에 헝가리를 방문하였다. 헝가리로서도 1989년 10월 23일 새로운 공화국이 출범한 직 후 최초의 외국 국가원수로서 노태우 대통령을 맞았다. 노태우 대통령은 헝가리 국회연설을 통해, 우리의 북방외교가 북한의 고립화가 아니라 북한의 개방화를 돕는 한편, 북한과 함께 화해와 통일의 길을 열어나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밝혔다. 방문기간 중 노태우 대통령은 헝가리의 정치지도자들과 만나 한국과 헝가리가 동서냉전의 벽을 허무는 시대적인 변화의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양국관계를 ‘화해의 새 시대를 함께 여는 동반자 관계’로 발전시켜 동서 세계의 가장 모범적인 관계로 발전시킨다는 데 합의하였다.
파란색 선수복을 입은 한국 대표 선수들의 등에 등번호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지에는 한국이 축구할 때 등번호도 없이 축구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쟁 직후 물자와 기술이 부족한 한국이 등번호를 새기지 못했다는 소문도 곁들여졌다. 이에 대해 생존 대표선수들은 "사소한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박장대소를 했다. 박재승 옹은 "글쎄 그걸 확인했어야 하는데"라며 말을 꺼냈다. 사실은 선수복 제작업소가 제작할 때 등번호를 깜박한 것이었다. 선수단도 월드컵을 며칠 앞두고 급하게 선수복을 주문했기 때문에 출발 직전 공항에서 선수복을 받아 미처 확인할 시간이 없었던 것. 경기 시간에 촉박하게 맞춰 현지에 도착하고서도 확인을 안하고 있었는데 막상 경기를 하려고 선수복을 꺼내니 등 번호가 빠져있었던 것이다.
학과 설립 이후 헝가리어 교육뿐만 아니라 헝가리 지역 사정 및 문화에 관한 강의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좋은 성과를 맺게 한 외국인 전임교수로는 초대 Szabo Zoltan교수를 비롯하여 Kiss Maria, Mesza Csaba, Kovacs Sandor, Katona Gabor, Balazs Jozsef, Suts Zoltan, Orosz Andrea교수 등이 재직하여 왔다. 박수영교수와 이상협교수는 각각 1995년과 1996년에 1년씩의 기간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 주관 해외 한국학 파견교수로서 헝가리 ELTE 대학교와 무역대학에서 한국학 강의를 맡아 진행하였다. 교수진들의 연구활동도 활발히 이루어져 많은 논문들이 발표되었으며, 주요역서 및 저서로 박수영 교수는”외국인을 위한 헝가리어“, “언어학의 사상사”, “헝가리어 문법연구” 등이 있으며 이상협 교수는 “헝가리어 회화”, “헝가리사”가 있고 한경민 교수는 헝가리 단편 모음집인 “가난한 사람들”과 노벨문학상 수상자 “케르테스 임레”의 “좌절”이 있다.
하지만 결과는 9대0 참패. 선수들은 그 때 수비 위주로만 갔어도 그렇게 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되돌릴 수 없는 결과였다. 사실 이날 경기를 뛰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46시간 쉬지 않고 비행기를 타고 온 선수들의 컨디션은 엉망이었고 요즘 전지훈련 격인 단체 훈련도 당시에는 일주일 밖에 없었다. 박재승옹은 여기에 조금 다른 이야기를 덧붙였다. 헝가리의 두 번 째 골이 터진 전반 18분까지는 잘 싸웠고 헝가리 관중들도 일어서서 관전을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골을 먹으면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것. 한국은 두 번째 골 5분 뒤에 또 골을 먹는 등 전반전에만 5실점을 했다. 선수들은 경기장을 나오면서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박재승 옹은 전했다. 강창기 옹은 선수들 중 4명이 다리에 쥐가 나서 실제 경기에는 7명이 뛴 셈이었다며 몰수패를 당할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대패는 당연한 결과였다는 뜻이었다. 헝가리전 다음에 벌어진 터키전. 당시 선수단을 이끌었던 고 김용식 감독은 헝가리 전에서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졌다고 느껴 다른 선수들을 대거 투입했으나 7대0으로 패했다. 강창기 옹은 두번째 경기에서도 패색이 짙어지자 한 골이라도 넣으려고 급한 마음에 뛰는 바람에 큰 점수차로 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1950년대 한국 축구선수들은 등번호도 없는 축구복 입고 월드컵 출전? 그 때를 돌아보며 풀어놓은 에피소드. 스위스 월드컵 한국과 헝가리전에서 관중들은 신기한 장면을 봤다.
한국 소개 - 주헝가리한국문화원
200달러 들고 46시간 날아 헝가리에 9대0 참패 - 노컷뉴스
한국외국어대학교1988년 3월 헝가리어과 출발부터 박수영교수(헝가리 어학 전공)가 부임하여 초대 학과장을 맡아 헝가리어과 교과과정을 체계적으로 수립해 나갔으며 학과 행정의 기본적 골격도 확립되었다. 이해 여름 헝가리 KLTE 대학교 하계 헝가리어 연수과정에 박수영 교수의 인솔 하에 본 학교 재학생 약 20여명이 참가하였으며, 이 KLTE 대학교 하계 헝가리어 연수과정에는 현재까지 계속 본 헝가리어과 재학생들이 참가하여 좋은 성과를 얻고 있다. 1989년 9월부터는 외국인 전임교수로 Szabo Zoltan(헝가리 문학 전공) 교수가, 한국인 교수로는 이상협 교수(헝가리 어학 전공)와 한경민교수(2000년 부임, 헝가리 문학 전공)가 부임하여 교육과정과 내용의 내실을 한층 더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정방규교수(헝가리 문학 전공), 김지영교수(헝가리 지역학), 유진일교수(헝가리 문학), 이상동교수(헝가리 문학 전공) 등 비전임교수와 대우교수의 강의와 연구활동을 통해 헝가리어과 교과과정과 연구내용이 한층 더 풍부해지고 다양해질 수 있었다.
특히 2000년 12월에 우리나라 최초로 약6만여 표제어가 수록된 “헝가리어-한국어 사전”이 박수영 교수와 이상협 교수의 주도로 발행되었으며, 현재 박수영교수를 연구책임자로 하여 한경민교수, 유진일교수, 김지영교수 등이 “한국어-헝가리어 사전”을 편찬 중에 있다. 본 학과의 교수진 모두는 한국외대 내의 “동유럽발칸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할 뿐 아니라 “한국동유럽발칸학회”의 주요 임원으로 봉사하며 연구활동과 대외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본 학과의 교과과정은 우선적으로 높은 수준의 헝가리어 어학능력을 갖추는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 유럽 내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헝가리 민족의 문화, 역사, 전통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헝가리뿐만 아니라 중부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학술적 연구역량을 키워 나가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기본적으로 1, 2학년과정에서는 헝가리어 어학능력 배양을 위한 교과목이 주를 이루고 이에 곁들여 헝가리학 입문, 헝가리 문화사 등의 교과목을 개설 운용하여 실용적 축면에서 뿐 아니라 학술적 측면에서도 헝가리 관련 전문인력으로서 필수적인 기본 소양을 형성하도록 하고있다. 3, 4학년 과정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및 언어학 그리고 문학 분야에 걸친 다양한 교과목을 계발하여 보다 심도 있고 세분화된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교과과정을 편성하여 운용하고 있다.
헝가리 '닮은 꼴' 두 나라 간 역사 알린 초머 모세 주한헝가리 대사
기록정보서비스>국정분야주제별검색>분야별주제검색6공화국 노태우 정부는 88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약 2개월 전에 발표한 7. 7선언은 서울올림픽을 동서(東西)의 거의 모든 국가들을 참여케 하는 전인류의 스포츠 제전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 전개된 동서냉전의 종식 등 세계적인 화해시대의 개막을 선도했다. 7. 7선언은 6공화국의 북방정책의 외교기조, 즉 △ 중소(中蘇)를 비롯한 전통적인 친북한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 정상화, △ 북한이 개혁 개방 정책을 통하여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이 되도록 유도함, △ 북방 사회주의 제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하여 한국외교를 전방위 외교로 광역화, △ 사회주의 국가와의 통상, 경제교류를 통하여 경제적 실익을 도모함이라는 기조를 실천하게 했다. 7. 7선언에서의 북한정책 기조 천명, 노태우 대통령의 유엔연설(1988. 10. 18)은 ‘신사고’ 외교안보 정책을 추진한 구소련 고르바초프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88. 9)은 한국의 북한외교 추진에 유리한 환경에 힘입어 한국은 1989년 2월 1일에 북방 사회주의 국가와는 처음으로 국교를 수립하게 이른다.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외교의 구체적인 가시적 노력의 일환으로 헝가리와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동서화해에 기여하려는 결단과 의지의 표명으로 헝가리와의 수교를 적극 추진하도록 지시하였다.
헝가리와 터키에 연달아 패하고 나서 선수들은 현지에서 축구 선진국 대표팀의 경기를 관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스위스 월드컵 대표팀 20명이 해외원정경기를 가면서 갖고 간 경비는 모두 200달러였다. 물가를 감안하더라도 빠듯한 돈이었다. 그래서 선수들은 경기장에 갈 버스를 빌릴 수가 없어 남은 경기를 못 봤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대신 경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한국 대표팀은 경기 후 이탈리아로 이동했다. 몇 년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토리노의 축구팀과 경기를 하고 300달러를 받아 로마로 이동한 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내 생전 소원은 한국의 월드컵 우승 소식" 2006 독일 월드컵을 보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는 박재승 옹은 아직도 축구경기를 보면 몸이 들썩인다고 한다.
1954 스위스 월드컵때 헝가리 vs 대한민국 9대 0이긴 한데
선수단은 비행기를 타고 떠나기 직전까지 표를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한 장 한 장 모았다. 이렇게 10장을 모았고 2장이 남은 상황. 한국 선수들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이름을 알 수 없는 잉글랜드 출신 신혼부부가 자신들의 표 2장을 양보해 선수단은 겨우 스위스로 출발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스위스 현지에 도착했지만 헝가리와의 첫 경기 시작 시각은 불과 10여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첫 경기 헝가리전, 대표선수 11명 중 4명 다리에 쥐 나 몰수패 위기 1954년 6월 17일 한국의 월드컵 본선 첫 경기인 한국과 헝가리 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는 세간의 말과는 달리 한국선수들은 헝가리가 강한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선수들은 "어릴 적부터 축구만 한 인생인데 헝가리 선수들에게 밀릴 것이 있겠냐"는 생각을 가져 전혀 위축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비행기 표가 없어 월드컵에 출전 못한 뻔 한국전쟁 이후 열악한 국내 상황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에 출전하는 선수들이라고 봐주지는 않았다. 선수들도 월드컵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었다. 전송하는 응원단 한 명 없는 1954년 6월 여의도 공항. 출발 직전 베스트 11에 뽑힌 스위스 월드컵 한국대표선수들은 대한국민항공사(KNA) 소속 민항을 타고 일본 하꼬네에서 도착했다. 하지만 월드컵 경기 일자는 점점 다가오는데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외국 여행 경험이 없었던 터라 공항에 가면 버스나 전차처럼 돈만 내면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줄 알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현지에 도착해서야 관계자들은 20여일 전에는 예약을 해야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선수단은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200달러 들고 46시간 날아 헝가리에 9대0 참패비행기표 예약하는 줄도 몰라, "후배들의 월드컵 우승은 천당가는 선물" 파일의 검색어를 반드시 입력해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던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의 한국 대표선수들. 반 세기가 지난 지금 생존해 있는 당시 선수들은 박재승, 강창기, 이종갑 옹 등 세 명 뿐이다. 이 가운데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사는 박재승옹(84)과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사는 강창기옹(80)에게 당시 이야기를 들었다. 노환으로 외부 접촉을 삼가고 있는 박재승옹은 다행히 집 근처에서 만날 수 있었으나 강창기옹은 4년째 전립선암으로 투병 중이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박재승 옹은 1954년 스위스에서 찍은 흑백 사진 속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기골이 장대했던 축구선수도 세월을 피하지는 못하는 법. 박재승옹은 여느 노인처럼 백발이 성성하고 거동도 쉽지 않았다. 다음은 당시 스위스 월드컵 대표선수들이 들려주는 ''대한민국 월드컵 첫 출전기''이다.
이를 알게된 한국 선수단은 난감해 했고, 대회 관계자들은 부랴부랴 천으로 된 숫자들을 구해 핀으로 등에 고정을 시킨 뒤 헝가리 전을 뛰게 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박재승 옹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축구하면서 등번호 안 달았겠느냐"며 "하지만 그때 월드컵에 참가한 국가와 관중들은 한국은 등번호도 없이 축구하는 줄 알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버스 빌릴 돈 없어 다른 팀 경기 못 본 것이 가장 아쉬워 당시 스위스 월드컵 대표팀이 가장 아쉬웠던 것은 무엇일까. 박재승 옹은 주저없이 다른 나라의 경기를 못 본 것이 가장 아쉬웠다고 말했다.
[스포츠 이야기] 첫 경기 '0대 9' 대패… 이젠 본선 9회 연속 진출
제3회 헝가리 영화제